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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고구려 · 백제 양국의 충돌

제 1 장 고구려 · 백제 양국 관계의 유래

 

남낙랑(南樂浪) · 동부여의 존망과 고구려 · 백제 양국의 관계

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高鄒牟, 다른 이름으로 고추모)과 백제의 기틀을 세운 소서노(召西奴)의 결별 이후, 고구려는 북방 지역의 열강들을 정복하며 차츰 북방의 유일한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백제는 온조왕(溫祚王)이 마한(馬韓)의 50여 개 소국을 통합하고 신라와 가라(加羅)에 해당하는 진한·변한 지역을 제압하며 남방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는 앞서 논의된 제4편과 제5편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 있다.

두 국가가 남북으로 대치하며 수백 년 동안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던 이유는 양국 사이에 위치했던 남낙랑(南樂浪)과 동부여(東扶餘)가 자연스러운 장벽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양국 간의 역사적 접촉에 대해 논하려 하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흥망성쇠를 살펴보겠다.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이 남낙랑과 동부여를 정복한 뒤, 이들 나라는 고구려에 반감을 품고 중국의 지원을 얻어 복수를 꾀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는 왕자 수성(遂成, 차대왕)이 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요동과 북낙랑을 탈환하였다. 이로 인해 남낙랑과 동부여는 고구려의 군사력을 두려워해 복속되었으며, 준동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 백제 또한 고구려에 예속된 상태로 군사를 제공하여 고구려의 서방 원정에 참가하였다. 이 내용은 앞서 제4편 및 제5-6편에서 다뤘다.

백제사에서는 초기 기록과 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며, 고구려 태조대왕 재위 시기가 백제 어느 왕조에 해당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후 초고왕(肖古王) 시기에 이르러서야 백제 역사 기록의 신빙성이 조금씩 확보되었다. 초고왕 32년(197년)은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즉위 원년으로, 이때 발기(發岐)의 난으로 인해 고구려가 요동과 북낙랑을 한족 공손씨(公孫氏)에게 빼앗기자 남낙랑과 동부여가 독립하였다. 남쪽에서는 대방 지역(현재의 장단이나 봉산 일대)에서 장씨 성을 지닌 호족이 반란을 일으키며 대방국(帶方國)을 세웠다. 같은 시기 백제도 이 상황을 이용해 고구려와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초고왕의 아들 구수왕(仇首王)은 북쪽 예족(濊)의 침략을 물리치며 국력을 강화했고, 이후 구수왕이 서거하자 그의 삼촌인 고이왕(古爾王)이 어린 태자를 대신하여 왕위를 차지했다. 

한편, 고구려는 위기에 처한 낙랑국을 공격하며 남낙랑 옛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도읍을 이전시켰다. 이에 남낙랑은 다시 풍천원(楓川原, 현재 철원·평강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혼란 속에서 백제의 고이왕은 남낙랑 변경을 침략해 주민들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기고 회군하였다. 고이왕은 아직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백제로서 위(魏)를 대적하여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그가 약탈해온 백성들을 돌려주고 화의를 청하였다.

그러나 유무(劉茂)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덞 개 나라를 다 남낙랑에게 떼어 붙이려 하였다. 이에 왕이 화를 내며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대방의 기리영(畸離營 : 지역 미상 )을 거쳐 가서 궁준(弓遵)의 목을 베고 위(魏)의 군사들을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張氏)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寶菓)를 고이왕(古爾王)의 태자 책계(責稽)에게 시집보내어 백제와 대(對) 북방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기원후 285년에 책계왕(責稽王)이 장인과 사위간의 정과 동맹국 간의 의리를 생각하여 대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가 충돌하게 된 시초이다.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幕容氏)의 발흥(勃興)으로 인하여 서북 방어에 급급하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성해짐을 시기하여 기원후 298년에 두 나라가 진(晉)의 원병과 함께 쳐들어갔는데, 책계왕이 나가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汾西王)이 즉위하였으나 7년 만에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뒤를 이어 비류왕(比流王)이 즉위하였다.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격파하여 선비를 쳐서 물리칠 뿐 아니라 또 남방 경영에도 힘을 써서 남낙랑과 대방을 멸망시키고, 얼마 후에는 또 백제와도 결전을 하게 되었으나, 그 때 미천왕이 죽어서 이 문제는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즉위하여 선비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전편(前篇)에서 말하였는데, 고국원왕이 북방 경영을 포기하고 남진주의(南進主義)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벌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을 만나 패배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남북 혈전의 형국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이를 서술하려고 한다.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하고 나서 낙랑국(國)을 습격하여 남낙랑구의 옛 수도인 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옮기고, 남낙랑국은 풍천원(楓川原: 지금의 평강(平康)과 철원(鐵原) 사이)으로 옮겼는데, 고이왕은 남낙랑국의 변경을 침략하여 그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이 시기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남낙랑과 협력하여 동부여를 공격해 승리를 거둔 뒤 회군했다. 당시 고이왕은 백제가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위나라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약탈당한 백성들을 돌려주며 화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무와 궁준은 이를 무시하고 신라 북부의 여덟 개 나라를 남낙랑에 병합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고이왕은 진충을 보내 대방의 기리영(위치 미상)에 가서 궁준의 목을 베고 위나라 군사를 격퇴하도록 했다. 이후 대방왕 장씨는 백제의 강력함에 두려워져 딸 보과를 고이왕의 태자인 책계와 혼인시켜 백제와 북방의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285년 책계왕이 장인과 사위 간의 정과 동맹국 간의 의리를 고려해 대방을 지원했는데, 이 사건이 백제와 고구려 간 충돌의 시작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의 발흥으로 인해 서북 지역 방어에 주력하며 남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가 점점 강력해지는 것을 시기하여 298년 진나라의 지원군과 함께 백제에 침입했다. 이때 책계왕은 전투에 나섰으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이 즉위했으나 7년 만에 남낙랑의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이후 비류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한편, 고구려 미천왕은 북쪽에서 요동과 북낙랑을 정벌하고 선비족을 격퇴했을 뿐 아니라 남쪽 경영에도 힘써 남낙랑과 대방을 멸망시켰다. 곧이어 백제와 결전을 준비했으나, 당시 미천왕의 사망으로 이 갈등은 흐지부지되었다.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즉위한 뒤 선비에게 패배했던 일은 이미 앞서 다룬 바 있다. 이후 고국원왕은 북방 경영을 포기하고 남진 정책을 채택해 백제를 자주 침략했으나, 결국 백제 근구수왕에게 패배했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 간 본격적인 남북 혈전 양상이 형성되었으며,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제 2 장 근구수왕의 영무(英武)와 고구려의 쇠퇴( 백제의 해외 정벌)


백제의 대방(帶方) 병합과 반걸양(半乞壤) 전쟁

백제의 근초고왕은 재위 초기에 왕후 진씨를 매우 총애하며 왕후의 친척인 진정을 신임하여 조정의 중요한 자리인 좌평(형벌과 옥사 관련 업무를 담당)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진정은 자신의 영향력을 믿고 권력을 남용해, 여러 신하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으며 약 20여 년간 국정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태자인 근구수가 뛰어난 통찰력으로 진정을 파면시키고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였다. 더불어 대방 지역의 장씨를 항복시키고 해당 지역을 군과 현으로 편입했으며, 육군의 체제를 정비하고, 최초로 해군을 창설하여 바다를 통해 중국을 침략할 야망까지 품게 되었다.

이 시기,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뒤, 북방 선비족에게 당한 패배의 치욕을 남쪽에서 되갚기 위해 백제를 자주 침공하였다. 특히 기원후 369년, 그는 기병과 보병 2만 명을 조직하여 황·청·적·백·흑의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 아래 군사를 나누고 반걸양 (현재의 벽란도)을 침공하였다. 이에 근구수가 나서 싸워야 했으며, 이전에 백제의 국영 목장에서 일하다 실수로 국마(국가 소유 말)를 다치게 하고 처벌을 두려워해 고구려로 도망쳤던 사기라는 인물이 고구려 군사가 되어 이 전투에 참전했다. 그런데 사기가 몰래 근구수에게 와서 정보를 제공하며, 고구려군 대부분이 실제 전력보다 숫자만 부풀린 의병이고, 오직 적기병만이 주요 전력이라는 점을 알렸다. 그는 적기병을 먼저 격파하면 나머지 군사는 자연히 흩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근구수는 이 말을 신뢰하고 정예 병력을 동원해 적기병을 기습해 대파하였다. 이후 고구려 군 전체를 공격해 완전히 격퇴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수곡성 (현 신계 지역) 서북까지 진격하였다. 그곳에서 돌로 기념탑을 세우고, 패하(대동강 상류 지역) 이남의 땅을 모두 백제의 영토로 복속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국원왕의 전사와 백제의 재령(載寧) 천도

반걸양 전쟁 이후 3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정예병 2만을 이끌고 패하를 건넜다. 그러나 백제의 근초고왕이 군대 지휘관 근구수를 보내 강 남쪽 언덕에 매복하게 하고 불시에 공격을 가해 고국원왕을 사살했다. 이후 백제군은 패하를 건너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켰고, 이에 따라 고구려는 도읍을 다시 국내성(현재의 집안현)으로 옮겼다. 이후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소수림왕)을 옹립하여 백제의 침략에 대비했다.

근초고왕은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상한수(현재의 재령강)까지 진격하여 황기를 세우고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한 후 수도를 상한성(지금의 재령)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에는 고국원왕의 평양 천도는 기록되어 있으나 소주류왕의 국내성 재천도는 나오지 않아, 이후 학자들은 고구려가 고국원왕 때부터 계속 평양에 도읍했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국내성을 종종 고국천, 고국양, 혹은 고국원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국원왕의 유해가 북쪽으로 옮겨져 장사지내진 후 그 명칭이 유래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내성으로의 환도가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 비문에 따르면, 평안호태왕이 국내성에서 성장하고 그 부근에 묻힌 것으로 보아, 왕의 전대에도 이미 국내성 환도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 이는 백제의 침략을 피하려는 전략적 이동이었다고 해석된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빼앗고 한성에 도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리지에서는 한성을 ‘남평양’이라 칭했다. 삼국사기는 대여섯 곳에서 한성을 고구려 남평양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한성)은 장수왕이 한 차례 함락시킨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으며, 이전 시기 어느 달, 어느 해에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는 내용도 없다. 따라서 북평양은 북낙랑(요동의 개평, 해성 등)을 의미하고, 남평양은 현재의 평양임을 암시한다. 이는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현재의 한성이 아닌 평양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일시적으로 물러난 한성 부근에는 한수, 청목령 등의 지명이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각각 현재 한강과 송악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과거 천도 과정에서 지명이 이전되기도 했으므로, 이 지명들이 근초고왕이 올 때 옮겨간 이름이지 현재 한강과 송악과는 무관하다. 백제에는 원래 세 개의 한강이 있었는데, 첫째는 현재 서울 가까운 곳의 한강이며, 두 번째는 재령 한성과 가까운 월당강(한강), 셋째는 문주왕이 천도한 직산 위례성과 가까운 양성의 한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첫 번째를 중한수와 중한성, 두 번째를 상한수와 상한성, 세 번째를 하한수와 하한성으로 명명한다.  


근구수왕 즉위 후의 해외경략

기원후 375년에 즉위한 근구수왕은 재위 10년 동안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평양을 한 번 침입한 일을 제외하고 큰 전쟁은 없었으나,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여 상당히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그는 선비족 모용씨의 연(燕)과 부씨의 진(秦)을 무너뜨리며, 오늘날의 요서(遼西), 산동(山東),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역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비록 이러한 기록이 백제 본기에는 상세히 나타나지 않았으나, 양서(梁書)와 송서(宋書)에는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晋平郡)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부여가 백제의 공격을 받아 녹산(塵山)을 떠나 연(燕)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근구수왕의 대륙 정복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다.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이미 고구려의 침략을 격퇴했으며, 대동강 이남 지역을 지배권 아래에 두었다. 이어 해군력을 강화해 중국 대륙에 진출, 모용씨를 격파하고 북경(北京)과 요서를 장악했다. 요서와 진평 두 군을 설치한 후 북으로는 현재 합이빈(哈爾濱)에 해당하는 녹산까지 이르러 부여의 수도를 점령했고, 이로 인해 북부여는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모용씨가 멸망하자 섬서성(陝西省)의 진왕 부견(符堅), 역시 선비족 출신의 강력한 지도자,이 세력을 키웠다. 이에 맞서 근구수왕은 오늘날의 산동 지역을 포함한 여러 차례 정벌을 감행하며 그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동시에 그는 남쪽으로도 확장을 꾀해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을 차지하고 진(晋)의 영토 일부를 빼앗았다. 여러 사서에 따르면, 그의 정복 활동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진서나 위서, 혹은 남제서 등의 사서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누락되었을까? 중국 사관들이 국치(國恥)를 꺼려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모용씨의 연, 부씨의 진, 척발씨의 위, 그리고 근세의 요·금·원·청 같은 왕조는 자신들의 역대 제왕으로 인정하며 그 공업(功業)은 기록했지만, 그 외의 역사는 대부분 삭제했다. 심지어 당태종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며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두 나라의 중국 공격 기록을 삭제하고, 조선 땅의 절반이 원래 중국 영토였다는 거짓 주장을 펼쳤다. 진서는 당태종 본인의 저술이었으므로 백제 근구수왕의 대중국 전공(戰功)을 의도적으로 제외했을 가능성이 크다.

위서와 남제서 같은 경우는 당태종 이전에 편찬된 것이지만, 여기에서도 근구수왕의 서정 기록은 제외되었다. 이에 반해 양서나 송서에는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 차지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기록이 너무 간소하고 내용이 소략하여 당태종이 이를 간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백제 본기의 기록조차 이러한 내용을 담지 않았을까?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해 관련 기록을 의도적으로 누락했거나, 후대에 사대주의가 팽배하여 조선이 중국을 공격한 사실은 중국 사서에 이미 기록된 것을 일부 인용하는 데 그쳤기 때문일 것이다. 나머지 기록들은 아예 삭제되거나 제대로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근구수왕의 무공 기록뿐만 아니라 그의 문화적 업적에 관한 기록도 많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근구수왕은 약 10년간 태자로, 또 다른 10년간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지만, 《삼국사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대한 언급은 박사 고흥이 《백제서기》라는 백제사를 편찬했다는 단 한 가지 기록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의 사적이 상당 부분 근구수왕의 업적을 모방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근구수왕의 이름 '근(近)'은 음이 '검건'으로, 백제 시대에는 '성(聖)'을 '검건'이라 불렀다. 따라서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의 '근(近)'은 모두 '성(聖)'을 의미한다. 또한 '구수(仇首)'의 음은 '검구수'로, 이는 마구간(馬廐)을 뜻한다. 일본 성덕태자의 칭호 '성덕(聖德)'은 근구수왕의 '근(近)'을 가져온 것이며, 성덕태자가 마구간 근처에서 태어났기에 그의 이름이 '구호(廐戶)'로 붙여졌다는 전설은 사실 근구수왕의 '구수(仇首)'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미루어 보면, 성덕태자가 17조 헌법을 제정했다거나 불법(佛法)을 전파했었다는 기록 역시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여 그것을 성덕태자전의 내용으로 삽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침류왕 원년인 기원후 384년 9월, "호승 마라난타가 진(晋)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종종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기록하며, 그로 인해 전왕 말년의 사건을 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서술한 예가 많다. 결국 마라난타가 백제에 도착한 것은 근구수왕 말년인 기원 383년이며, 침류왕 원년인 기원 384년은 아니다.

 

제 3 장 광개토태왕의 북진정책과 선비족 정복

 

광개토태왕의 북토(北討) 남정(南征)의 시작

기원후 384년에 근구수왕이 사망한 후, 그의 맏아들 침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침류왕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진사왕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천성이 호탕하고 제멋대로였다. 그는 근구수왕이 이룩한 강대국의 권력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며, 청목령(지금의 송도)에서 팔곤성(지금의 곡산)까지 성곽을 쌓았으며, 이를 서쪽으로 연장해 서해에 이르는 천여 리의 장성을 건설해 고구려를 방어하려 했다. 또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가장 웅장한 대궐을 짓고, 대형 연못을 만들어 다양한 물고기를 기르며 그 안에 인공 섬을 조성하여 희귀한 새와 식물을 키웠다. 그 결과 그의 사치와 오락은 극에 달하였고, 백성들의 원망은 깊어 갔다. 이 와중에 해외 영토는 적국들에게 빼앗기며 나라의 기세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편,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진사왕과 동시대의 인물로, 그의 조부 조왕이 피살된 원수와 영토를 잃은 치욕을 갚고자 항상 백제 정벌을 계획하였다. 당시 선비족의 모용씨가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진왕 부견이 90만 대군으로 동진을 공격했다가 대패하면서 고국양왕은 이를 기회 삼아 요동, 북낙랑, 현도 등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모용씨의 한 인물인 모용수가 다시 봉기하여 현재의 직예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연으로 바꾸고 세력을 회복했다. 그는 수시로 군사를 보내 요동 지역을 괴롭혔고, 몽골 지역 등지에서 와려족(본기의 계약족으로 거란)까지 강성해져 고구려의 신성 등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국양왕은 의욕적으로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되찾고 와려족을 몰아내 북쪽 경계를 방어하기에 급급했으며, 남쪽 문제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고국양왕 말년, 태자 담덕(후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영특하고 용맹하여 병마를 지휘하며 뛰어난 전략으로 백제 군을 공격했다. 이를 통해 석현 등 10여 개의 성을 회복하였고, 이로 인해 백제의 진사왕은 여러 차례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백제는 수도를 한강 남쪽 위례성(현재의 광주 남한산)으로 옮겼다. 이후 담덕의 군사를 두려워한 백제는 싸움을 회피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강 이북 지역 대부분이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또한,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관미성(현재의 강화)도 담덕의 해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전쟁을 기록하고 있지만,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석에는 관련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무슨 이유일까? 삼국사기는 본래 고기(古記)를 근거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고기가 전하지 않음으로 인해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여러 문헌에 인용된 고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는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연대 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연대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각 왕의 재위 기간에 무작위로 사실을 배분한 부분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아라가라의 멸망은 법흥왕 원년의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진흥왕 37년의 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담덕이 석현 등의 성을 회복하고 나려족을 격퇴한 사건도 고국양왕 말년에 태자 시절에 있었던 일임에도, 왕이 된 이후의 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읽을 때는 이러한 오류를 잘 분별하여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광개토태왕의 과려족(顆麗族) 원정

고구려의 태자 담덕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담덕은 왕에 즉위한 지 5년째인 395년에, 나려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자 이에 대응하여 원정을 계획하고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나려의 부락 6~7백 곳을 파괴하고 소, 말, 양 등을 노획하여 귀환했다. 

여기서 파부산은 《수문비사》에 따르면 현재 음산산맥의 와룡이라 하고, 부산은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으로 추정된다. 염수는 《몽고지지》에서 소금기 있는 호수나 강이 많다고 언급되었으며, 특히 아랍선산 아래 길란태라는 지역에 염수가 있어 물가에 2자에서 6자 높이로 소금더미가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를 분석하면, 고구려 광개토왕의 원정 활동이 현재의 감숙성 서북부 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중요한 원정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원정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에만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검토하며 와려에 대한 정체를 파악할 때, 본기의 내용에 따라 와려를 글안(契丹)으로 보는 관점이 있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당시 글안이란 명칭은 쓰이지 않았으며, 글안은 선비족의 후예로, 모용씨와 우문씨 등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본기에 와려를 글안으로 표기한 것은 후대 사학자들의 오류로 보인다.

와려가 글안이 아니라면, 그들은 어떤 종족인가? 《위서》와 《북사》 등의 사서에 따르면, 와려는 흉노의 후예인 유유(柔然)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 종족은 현재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한때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다. 와려와 유유는 발음상 유사성이 있어, 와려가 흉노의 후손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광개토태왕 왜구  격퇴

기록에 따르면, '왜(倭)'는 일본의 고유 명칭 중 하나로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대 일본에서는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를 주로 북해도의 아이누족으로, '일본'을 야마토족으로 흔히 여긴다. 이는 일본어에서 '화(和)'와 '왜(倭)'의 발음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피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변화로 보인다. 과거 중국과 한국 문헌에서 묘사된 '왜'는 종종 문화가 결핍된 잔인하고 야만적인 부족으로 그려졌는데, 일본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화(和)'라는 새로운 명칭을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건국 이후에도 왜는 지극히 미개한 상태였으며, 일본 삼도(본주·시국·구주)에서 단순한 고기잡이와 사냥에만 의존하며 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백제의 고이왕은 이들에게 봉직과 농작, 그리고 다양한 공예 기술을 전수했다. 그는 일본으로 왕인 박사를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치게 하고, 백제의 이두자를 바탕으로 가나 문자 체계를 창제하도록 도왔다. 이를 통해 왜는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기본적으로 공격적인 특성을 지녀 오히려 백제를 침범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진사왕 말년에는 그 침략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석현 등 십여 개의 성을 탈환하려는 노력을 펼쳤다. 391년(광개토왕 원년), 백제 왕은 진무에게 새로 점령된 고구려 영토를 공격하게 했고, 동시에 왜와 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395년, 광개토왕은 반격에 나서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백제의 주요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무력을 과시했다. 또한, 아리수(현 월당강)를 직접 건너 백제군 수천 명을 전멸시키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결국 백제 아신왕은 왕족 및 대신들을 인질로 넘기고 조공을 바치며 굴복해야만 했다. 이후 수도를 현재의 직산인 ‘신위례성’으로 옮겨 고구려의 계속된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백제는 고구려가 북쪽에서 선비족과 전투 중일 때, 기회를 틈타 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 점령지를 침략하거나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대응하여 광개토왕은 신속한 군사 작전을 펼쳐 왜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신라를 구원했다. 오늘날의 고령 인근 지역에서는 왜군을 대대적으로 물리쳐 신라 내물왕이 직접 광개토왕에게 감사를 표한 바 있다. 특히 407년 대동강 유역의 수전에서는 수만 명의 왜군을 전멸시키고 대량의 무기와 장비를 노획하는 등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왜는 다시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였고 남쪽 지역은 오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환도(丸都) 천도와 선비 정복

광개토왕은 야심이 크고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동족에 대한 사랑 또한 대단했다. 백제를 공격한 것은 그가 왜(왜국)와 결탁한 것을 미워해서지, 단순히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주요 목적은 북쪽의 강력한 선비족을 정벌하고 현재의 봉천성, 직예성 일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쪽 지역에 대한 전쟁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의미를 가졌고, 북쪽을 향한 전쟁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목표를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 광개토왕은 제5 수도로 안시성(현재 개평 부근)을 삼아 천도하였고, 선비족 모용씨와 약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허를 찌르는 전술로 승리했다. 그는 요동에서 요서(총칭하여 현재의 영평부까지)를 차지하며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승리를 이뤄낸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연왕 모용수조차 패퇴하게 만들고, 그의 후임인 연왕 모용성, 모용희 등 저명한 영웅들도 광개토왕의 기세에 밀려 고구려에 상당한 영토를 할양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진서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간략히 다루며 "태왕(좋은 태왕)이 연나라 평주의 숙군성을 침공하자 평주의 자사 모용귀가 도망쳤다"는 기록만 남겼으며, 도리어 연나라의 상승세를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 역사가들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 관례를 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춘추에서도 적족이 위나라를 멸망시키는 기록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바 있다. 더불어 선비족의 연나라가 몰락하고 척발씨의 위나라가 강성해진 배경 역시 광개토왕의 연나라 공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동진의 유유가 일어나 선비족과 강족을 격파하며 송고조가 황제로 설 기반을 다진 것 또한 간접적으로는 광개토왕의 공격과 연결된다. 그러나 중국 사가는 이러한 변화를 기록하지 않아 5세기 초 중국 대륙의 중요한 정세 변화 원인을 흐리게 만들었다.

광개토호태왕비는 진서와 달리 왕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비문에 선비족 정복 관련 구절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과거 집안현을 방문해 호태왕비를 직접 보고자 하던 중, 여관에서 만난 만주 출신 소년 영자평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비석이 오랜 세월 동안 풀과 설 속에 묻혀 있다가 만주 사람 영희라는 이가 이를 발견하였으나, 그 비문에는 고구려가 영토를 빼앗은 내용을 담은 글자가 많았고, 이 글자들은 칼과 도끼로 훼손되었다." 이후 일본인이 이 비석을 손에 넣어 상업적으로 비문을 복제하다 보니 손상 부분을 석회로 덧칠하여 일부 글자가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진실된 내용이 삭제되고 왜곡된 정보가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시사되었다.

결국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비문에서 선비족 정복과 관련된 광개토왕의 주요 공적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광개토왕이 평주를 점령한 후 선비족의 쇠퇴 시기를 틈타 추가로 영토 확장을 이어갔다면, 그가 다스리던 국토는 그의 존호인 '광개토(땅을 넓힌 임금)'에 걸맞게 훨씬 방대했을 것이다.

호태왕은 동족을 애틋하게 여긴 군주였다. 연신 풍발이 연왕 희를 살해하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이자 연에서 관리로 지내던 고운을 천왕으로 세워 호태왕에게 보고했을 때, 그는 이를 듣고 "이는 같은 민족이니 싸워서는 안 된다"고 하며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했다. 또한 친족 관계를 따져 혈연의 정을 확인하면서 전쟁을 멈췄다. 이로 인해 호태왕의 북진 정책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호태왕은 375년에 태어나 391년에 즉위한 뒤, 41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39세였다.

현재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석은 봉천성 집안현 북쪽 약 2리 지점에 위치하며, 그 길이는 약 21척(폭은 4척 7촌에서 6척 5촌 사이)이다. 이 비석은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가 발견해 인쇄본으로 제작했으나, 이미 많은 글자가 훼손된 상태였다. 이후 일본인이 이 비석을 차지해 추가로 인행하여 판매했지만, 일부 떨어진 글자를 석회로 복원한 흔적이 있는 바람에 원문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비석의 본래 내용을 완전히 밝힐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제 4 장 장수태왕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장수태왕의 역대 정책의 변경

기원후 413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49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79년간 재위하였다. 이 기간은 조선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 평가된다. 어떤 변화였을까?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북진주의나 남북병진주의를 주로 정책으로 삼았으나, 장수태왕 시대에 이르러 북을 방어하고 남으로 진출하는 북수남진주의가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남방 삼국과 고구려 간의 공수동맹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졌고, 신라와 가야(가락) 또한 점차 힘을 키우며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위치로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는 남쪽을 결코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외적으로 지나, 선비, 와려 등의 여러 민족을 정복하여 동족 국가들이 자연스레 고구려의 깃발 아래에 들어오도록 만들었으나, 장수태왕은 이와는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그는 먼저 동족 국가들을 통합한 후 외적과 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정책을 수정하면서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수남진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연나라에서는 풍발이 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고구려 왕족인 고운을 옹립해 황제로 세우며 고구려의 공격을 면했으나, 이후 풍발은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해 "천왕"이라 칭한다. 그의 후계자인 홍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선비족의 탁발씨가 산서 지역(지금의 산서성) 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세력을 키웠고, 결국 황하 이북 대부분을 장악하며 군세를 파병해 연나라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연왕 홍은 국토가 점차 줄어들며 계속되는 위협에 맞서기 힘들어지자, 수차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장수태왕은 북수남진이라는 기조에 따라 위나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꺼렸으나, 연나라가 모용희 이후 쇠락해 백성을 착취하며 화려한 궁전과 동산을 조성하고 수많은 보물과 미인을 궁중에 모아들여 방탕한 사치를 일삼는 모습을 탐내게 된다. 장수태왕은 연나라 사신들에게 "고구려는 남쪽 백제 문제로 인해 지금 당장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할 수 없으나, 연왕이 고구려로 온다면 장수를 보내 맞이하고 추후 적절한 시기에 지원하겠다"고 속이며 연왕 홍을 유인했고,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기원후 426년, 북위가 기병 1만과 수만의 보병을 동원하여 연(燕)의 수도 화룡, 현재의 업 지역을 침공하자, 고구려 장수왕은 장수 맹광(말치)을 보내 대군을 이끌고 연왕 흥을 마중하도록 했다. 위군은 이미 연의 수도에 도달해 서문으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맹광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문으로 급히 진격하였다. 그곳에서 연의 상서령 곽생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고, 곽생을 쏘아 죽인 뒤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어 대궐에 불을 지르고 귀중한 보물과 미인들을 수습한 뒤 고구려로 돌아왔다.

위의 황제는 소중한 보물과 미인을 잃은 데 대해 직접 회복을 주장하지 못했지만, 연왕 홍이 고구려에 머무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며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연왕 홍을 그대로 보호하였다. 대신 위의 환심을 잃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자주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한편으로는 남중국의 송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어 위를 견제하는 외교 전략을 취했다.


위기승(圍碁僧)의 음모와 백제의 피폐

장수왕은 외교 전략으로 중국의 위(魏)와 송(宋)을 견제하며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왕인 광개토왕과 같은 대담한 전략가라기보다는 교묘하고 음흉한 모략가에 가까웠다. 전투에서 정면 공격 대신, 간사하고도 악독한 계책으로 적국의 내부를 먼저 혼란에 빠뜨린 뒤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을 선호했다. 평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비밀리에 조서를 내려 백제의 정치를 흐트러뜨릴 교묘한 전략을 구상할 인재를 찾았고, 이에 응한 자가 바로 불교 승려 도림이었다.

당시 백제의 근개루왕은 바둑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도림 또한 바둑의 명수였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린 뒤, 죄를 짓고 망명한 자라는 신분으로 위장해 백제로 들어갔다. 그는 근개루왕과 만나 바둑을 서로 두며 신임을 얻었고, 날이 갈수록 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갔다. 근개루왕은 도림을 유일한 바둑의 적수로 여기며 그를 극진히 아꼈다.

몇 년 동안 왕 곁에서 그의 성격과 행동을 철저히 파악한 도림은 이렇게 말하며 술수를 시작했다.
 "폐하, 저 같은 죄인이 대왕의 총애를 받아 이렇게 풍족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게 되었으니, 감사를 다하기 어렵습니다. 감히 소인의 지혜로 한 말씀 올리자면, 폐하의 나라는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부는 험한 산세로 가득하고 외부는 바다와 강이 둘러싸여 있어, 적군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침범하지 못할 천혜의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자연 조건과 대왕님의 통치력으로 위엄을 떨치신다면 사방의 나라들이 모두 우러러 모시며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을 높게 쌓지 못하고 궁을 웅장하게 짓지도 않으며, 선왕의 유골을 작은 언덕에 묻고, 백성들의 집은 해마다 장마에 휩쓸려 떠내려가 외국인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일이 빈번하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존경하며 우러러볼 수 있겠습니까? 이는 대왕께서 받아들이실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개루왕은 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 전국의 남녀를 모두 동원해 벽돌을 굽고, 둘레가 수십 리에 이르는 성을 높게 쌓았습니다. 성 내부에는 마치 하늘에 닿을 듯한 웅장한 궁궐을 세웠으며, 욱리하, 지금의 양성 한래 지역에서 큰 돌을 가져와 대석관을 만들고, 그 안에 선왕의 유골을 담아 커다란 왕릉을 조성하여 안장했습니다. 또한, 왕성 동쪽에서 숭산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건설해 장마로 인한 물난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공사를 진행한 결과, 국고는 바닥났고 군사 자원도 부족해졌으며, 백성들의 힘은 고갈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 도적 떼들이 들끓었고, 나라의 형세는 마치 쌓아 올린 알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를 확인한 도림은 자신의 계략이 성공했음을 깨닫고 고구려로 돌아가 장수왕에게 이를 알렸습니다.


고구려군의 침입과 근개루의 순국(殉國)

장수왕이 도림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치' 제우와 백제에서 항복한 장수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을 보내 약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신위례성(지금의 직산 지역 인근 고성)을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개루왕은 고구려 군대가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결국 도림의 간사한 계략에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태자 문주를 불러 말하길, "내가 어리석어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구나. 지금 비록 위태로운 재난이 닥쳤으나, 누가 나를 위해 힘써줄 수 있겠느냐? 고구려 군사가 이르면 나는 국가의 희생양이 되어 속죄하겠으나, 너마저 나와 함께 죽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서둘러 남쪽으로 가서 의병을 모으고 외국의 원조를 구하여 우리의 조상들이 세운 업적을 이어가야 한다"며 눈물로 문주와 이별했다.

제우 군은 북성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곧이어 남성을 공략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싸울 의지를 잃었다. 결국 근개루왕은 친히 전투에 나갔으나 고구려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고구려 측의 결루와 만년은 처음에는 예의를 차려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며 인사를 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왕의 얼굴에 세 차례나 침을 뱉고 꾸짖으며 왕을 결박했다. 이후 그들은 왕을 아차성(지금의 광주 아차산)으로 끌고 가 항복을 권유했으나 근개루왕이 끝내 이를 거절하자 목숨을 앗아갔다. 이로 인해 신위례성, 즉 지금의 직산 이북 지역 일대는 모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한편, 아신왕이 광개토왕의 공격을 피해 신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다만, 정다산이 직산을 문주왕 남천 후의 잠시 머문 임시 수도로 판단한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사성은 직산의 옛 성터이며 숭산은 아산의 옛 이름이다. 이 점을 참고하면 신위례성이 아신왕이 천도한 곳임은 명백하며, 문주왕 이전 시기에 이미 사용된 장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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